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 로셸 (문단 편집) ==== 제2차 포위전(1627~1628) ==== 1622년의 몽펠리에 조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624년에 재상이 된 [[리슐리외]]는 다시 신교도들을 탄압하였다. 1625년 2월에 재차 반란이 일어났고, 라 로셸 인근의 레 섬이 신교도령이 되었다. 레 섬은 긴 전투 끝에 그해 9월, 다시 왕당파가 소유하였고, 1626년 2월 5일에 파리 조약이 맺어지면서 라 로셸은 다시 평화를 찾는 듯했다. 다만 도시는 함대 소유가 금지되었고, 시가지 서쪽 바다 건너의 프랑스 요새는 '적정 기한' 내에 철거되기로 했다. 한편, 1572년에 맺어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대[[합스부르크]] 동맹은 1624년에 갱신되지 못했다. 그리고 1626년, 리슐리외는 비밀리에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개신교 측에 가담하기 전에-- 국내의 개신교 세력을 일소하기로 했다. 이러한 기류를 파악한 라 로셸은 재무장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27년 6월, [[찰스 1세]]의 명령으로 파견된 잉글랜드 함대는 버킹엄 백작의 지휘로 도시 근처 레 섬에 상륙하였다. 라 로셸의 시민들은 잉글랜드 함대의 입항에 반대하였다. 프랑스 국왕 측에 빌미를 주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이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슐리외의 국왕군이 도시를 공격하자 시민들은 어쩔수 없이 잉글랜드군을 수용하여 제2차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백년전쟁이 종결된 1453년 이후 174년만에 잉글랜드-프랑스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https://en.m.wikipedia.org/wiki/Siege_of_La_Rochelle#/media/File%3ALa_Rochelle_during_the_1628_siege.jpg]] 1627~1628년의 제2차 포위전 당시 라 로셸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d/GuittonJean.jpg]] 결사항전을 결의하는 시민들 1627년 8월부터 도시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9월 10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프랑스 공병들은 육지쪽 성벽을 완전히 둘러싼, 11개의 탑을 갖춘 포위 성벽을 만들었고, 이 작업은 1628년 4월에 끝났다. 포위군은 30,000명에 이르렀다. 1627년 11월부터는 바다 쪽에도 방조제 형식의 벽을 만들었고, 1628년 3월에 완공되어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동맹이어서 그 배들로 병력 수송까지 했다. 그리고 스페인 전함들도 해상 봉쇄에 참가하였다. 1628년 4월, 잉글랜드의 구원 함대가 포츠머스를 출항하였으나 해상에 세워진 방벽에 막혀 회군하였다. 그해 8월에 출발한 30여척의 구원대가 9월경에 도시에 접근하였으나 프랑스 함대에 포격을 가하는 것에 그친 후 돌아갔다. 해상 방벽의 위력은 막강하였다. 두 차례의 시도가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본 시민들은 결국 1628년 10월 28일에 국왕군에 항복하였다. 27,000명에 달하던 도시의 인구는 5,000명으로 줄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